레진코믹스

나도 동대문종합시장으로 원단들 찾으러 돌아다녔음.

물론 나는 그 원단의 가격을 알고 있음. 근데 A 브랜드는 가디건을 만들어 11만원이라는 가격에 팔고 있었고, B브랜드는 셔츠형자켓을 만들어 정가를 8만원으로 책정했는데 안팔렸는지 할인해서 4만원에 판매하고 있었음.

나는 그 두 브랜드의 제품을 다 사봤음. 공임은 무조건 B브랜드가 더 들었을 거임. A브랜드의 가디건은 아무런 디테일 없이 단추 다는 작업만 필요했을거니까. B브랜드의 셔츠형자켓은 단추 다는 작업 + 카라, 소매, 커프스, 심지어 주머니까지 있었음. 거기에 더불어 원단을 사용하는 요척도 A브랜드의 가디건보다 많음.

근데 A브랜드는 11만원, B브랜드는 4만원에 팔고 있음. 그때 두 브랜드의 인식은 A브랜드는 패션커뮤니티에서 해당 제품 출시 전부터 글을 쓰면서 인지도를 올린 상태였고, B브랜드는 그냥 가성비 옷 만드는 브랜드 정도였음.

그 원단이 너무 내 취향이라 나도 그 원단으로 제품 만들고 싶었는데 사실 내가 만드려던 것도 셔츠형 자켓에 가까움. 근데 내가 셔츠형자켓으로 만들었으면 나도 안 팔려서 4만원에 땡처리 하듯 팔았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내가 일했던 브랜드도 그냥 존재감 없는 수많은 브랜드 중 하나인 수준이었거든.

내가 봤을 때 유스, 포터리 이런 도메스틱 브랜드 말고 우리가 가격적인 측면에서 그나마 접하기 쉬운 소위 말하는 무신사에 입점되어 있는 도메스틱 브랜드들 다 옷 잘 만들고 원단 괜찮고 퀄리티 괜찮음. (ㄹㅇ 보세 같은 무신사 입점 브랜드들 제외)

근데 브랜딩의 차이와 마케팅의 차이로 가격이 차이나고 브랜드가 성공하느냐 망하느냐의 차이인 것 같고 이걸 해결하는게 진짜 엄청 어려운 일 같음.

솔직히 판매가 15만원 책정해놓고 셔츠 만들라 그러면 포터리급 셔츠 다 만들 수 있음. 근데 그렇게 만들어도 못파니까 못만드는 거임. 브랜딩, 마케팅이 제대로 안 된 브랜드에서 갑자기 15만원짜리 셔츠 팔면 누가 사겠음. 아무리 상세페이지에 이태리 고급 원단, 국내 하이엔드 브랜드의 셔츠만 생산하는 공장에서 제작한 셔츠라고 써놔도 안 팔린다는 거임.

그래서 도메스틱 브랜드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적당한 가격에 적당히 무난한 디자인으로 최대한 대중적으로 잘 팔릴 만한 디자인으로 뽑는 거라고 생각함. 그 후에 마케팅과 브랜딩을 잘해서 기반이 탄탄해지면 그때서야 자기들이 해보고 싶었던 디자인을 할 여유가 생김.

도메스틱 브랜드들 대부분 당장의 목표가 '생존'이라고 생각함. 일단 생존해야 그 후에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할 여유가 생기니까. 생존하기 위해 지금 유행하는, 지금 잘 팔리는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 수밖에 없는 거고 그로 인해 도메스틱 브랜드는 다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걸거임. 근데 생존하려면 어쩔 수 없이 판매 가능성이 높은 제품을 만들 수밖에 없음.

그 후에 브랜드의 팬이 생기고 고정 소비자들이 생기면 새로운 제품이 나오는 거고... 안 생기면 망하는 거고...

또 한가지 에피소드는 그냥 심심해서 적어보는데 작년에 니트 만드려고 니트 원사 보러 동대문종합시장 돌아다니다가 진짜 특이한 니트 원단을 발견했음. 워낙 특이한 원단이라 한번 보면 앚을 수 없는 원단임. 그래서 이걸로 만들까? 생각만 하고 그냥 접었는데 이 원단 가격이 엄청 쌈. 좋은 원단도 아니었어서 엄청 싼 가격이었음. 

근데 얼마 뒤에 나름 팬층이 있는 도메스틱 브랜드에서 내가 본 똑같은 원단으로 니트를 만들어서 판매하는데 가격이 10만원임...ㅋㅋㅋ 근데 그 브랜드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사더라...

그리고 최근에 이 원단으로 만든 니트를 다른 브랜드에서 또 봤음. 얘네는 7만원대에 팔고 있음.

이런거 보면 참 브랜드 가치가 중요한 것 같음. 역으로 말하면 지금 별로 안 유명한 도메스틱 브랜드들이 만드는 제품들 중에 유명한 브랜드들이 쓰는 동일한 원단, 괜찮은 퀄리티로 만드는 제품들이 엄청 많을 거란 말임. 이런거 찾는 것도 재미임.

그러니 다들 도메스틱 브랜드들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열심히 하는 브랜드들 응원해줍시다!

자기 전에 써서 뭔 말 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