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진코믹스

https://www.fmkorea.com/4245203423 - 이 글 보고 생각난 게 있어서 써 봄.

비록 생전에 세종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태종실록>을 열람하는 건 실패했지만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실록, 즉 <태조실록>은 열람한 적이 있었음. 그것도 두 차례나.

1425년 12월, <태조실록>을 열람하고 싶었던 세종은 복사본을 만들어 자신이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두라고 곽존중에게 명했음. 그러자 변계량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반대함.

<"《태조실록》에는 비밀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신과 하륜(河崙)이 알고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또 한 책을 베껴서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여기서 "신(변계량)과 하륜만이 알고 있는 비밀내용"을 <태조실록>을 편찬할 때 변계량과 하륜이 자의적으로 윤색하거나 왜곡한 기록 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변계량이 세종의 <태조실록> 열람시도를 반대했던 행동도 설명이 됨.

하여튼 이렇게 반대가 많자 세종은 <태조실록> 열람을 포기함.

<태조 이성계>

그런데 그 후 세종이 <태조실록>을 열람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 바로 훗날 <태종실록>을 열람하고자 했던 세종 본인의 발언에 근거한 것임.

<"(...) 《태조실록》을 보고자 하여 여러 신하에게 상의하였더니, 유정현(柳廷顯) 등이 ‘조종이 정해 놓은 법에 의거하여 조종의 사업을 잘 계술(繼述)하는 것이 실상은 아름다운 뜻이 된다.’ 하므로, 이에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세종의 실록열람을 찬성했던 유정현은 1426년 5월에 사망했음. 변계량이 세종의 <태조실록> 열람을 반대했던 시기가 1425년 12월이었으니 세종이 <태조실록>을 열람했던 시기는 아마도 1426년 봄으로 추정됨.

이로부터 약 20년 뒤인 1446년 11월, 세종은 또다시 <태조실록>을 열람했음. 물론 이 때도 춘추관에서 전조의 실록을 열람하는 행동은 옳지 못하다고 반대했지만 세종은 반대를 뿌리치고 <태조실록>을 바치게 함.

이렇게 <태조실록>을 열람하고도 별 일이 없었으니 세종 입장에서는 "<태종실록>도 열람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함. 그러나 <태종실록>의 열람시도는 <태조실록>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음.

세종의 중신들은 태조 치세에는 젊거나 직급이 낮아서 <태조실록>에 뭐가 기록되어 있는 별 상관이 없었음. 

그러나 <태종실록>에 대해서는 태종 재위기에 있었던 각종 민감한 사건이나 행적 등에서 세종의 중신들은 자유롭지 못한 기록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대가 훨씬 더 심했을 가능성이 높음. 그래서 세종도 결국 뜻을 단념하고 <태종실록> 열람을 최종적으로 포기했을 거임.

여담으로 이렇게 <태조실록>을 열람하면서 세종은 태조 이성계와 그 선대의 행적을 기록한 <태조실록 총서> 부분이 매우 부실하다는 걸 깨달음.

특히 조선 건국 이전 이성계의 군사활동에 관한 기록이 매우 소략하고 부실하다면서 그 당시 일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을 노인들을 만나고 현지 조사를 통해 기록을 보완하라고 여러차례 명했음. 당장 이성계의 최대 공적인 황산대첩에 관한 기록도 소략했다고 간접적으로 언급할 정도면 나머지 기록들은 얼마나 부실했을 지 안 봐도 비디오임.

마침내 1448년 6월, <태조실록 총서>가 새롭게 증보편수되었고 그 결과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기록이 매우 풍부해졌음. 

물론 그 부작용으로 태조 이성계를 마치 무협지 인물로 보이게 만드는 기록도 다수 포함되었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조선 건국 이전의 태조 이성계의 행적을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