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오늘자 한송이 인스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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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106회 작성일 21-12-31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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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2573경기 0.262/0.337/0.328 2460안타 28홈런 793타점 580도루 OPS+ 87 wRC+ 90


타격 스탯만 살펴보면 리그 평균보다 못한 타격을 가졌고 파워는 없지만 발은 빠른 선수라는 것을 다들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타격만 본다면 명예의 전당 입성은 물론 투표 자격도 받지 못할 성적이지만 이 선수는 2001년 첫 투표에서 득표율 91.74%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럼 이 선수는 '어떻게 첫 턴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역대 최고의 유격수 수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영구결번이자 '오즈의 마법사(Wizard of Oz)' 아지 스미스(Ozzie Smith)이다.


ozzie smith.jpg [MLB 레전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
아지 스미스의 시그니처 동작인 백플립

1. 프로 데뷔 전


1954년 12월 26일 아지 스미스는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난다. 스미스가 태어난 곳은 앨러바마 주의 모바일으로 행크 애런, 윌리 매코비가 모바일 태생의 대표적인 선수들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6살 때 가족이 LA 근교로 이주했기 때문에 실제로 성장한 곳은 캘리포니아 주였다. 스미스는 어릴 때부터 야구에 관심이 있었고 매년 25경기 정도를 버스를 타고 다저스타디움에 가서 다저스를 응원했다. 고등학생이 된 스미스는 야구와 농구를 병행했고 이때 동료 중에는 MLB 영구결번 1명NBA 영구결번 1명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미스는 1974년에 Cal Poly San Luis Obispo 대학에 진학했다. (현역 메이저리거로는 시애틀의 미치 해니거, 다저스의 저스틴 브루힐이 이 대학 출신이다) 스미스는 대학교 2학년 때 팀의 코치였던 Berdy Harr에게 스위치 타격을 배웠고 이후 스위치히터로 커리어를 보내게 된다.


이후 1976년 드래프트에 나온 스미스는 디트로이트의 7라운드 지명을 받게 된다. 하지만 계약금에서 1,500달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협상이 결렬된다. 디트로이트가 제시한 금액은 8,500달러, 스미스의 요구액은 10,000달러였다.

이듬해인 1977년 드래프트에서는 샌디에이고가 4라운드에서 스미스를 지명한다. 스미스는 캘리포니아에서 자랐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샌디에이고를 선호했고 5,000달러에 계약하면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다.


SD.jpeg [MLB 레전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

2. 샌디에이고 시절 (1977~1981년)


샌디에이고에 입단한 스미스는 데뷔 첫 시즌인 1977년 로우 싱글 A에서 뛰었고 68경기에서 0.303/0.391/0.362 30도루를 기록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1978년 스프링캠프 초청을 받게 된다. 당시 샌디에이고 감독이었던 앨빈 다크는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 주전 유격수는 스미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고 스미스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을 증명해낸다. 하지만 앨빈 다크는 스프링캠프 도중 새 단장에 의해서 해임된다. (스프링캠프 도중 감독이 해임된 건 역대 2번째이다)


1978년 4월 7일 스미스는 8번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면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다. 스미스는 데뷔 전에서 2타석에서 볼넷 1개를 골라낸 후 6회에 대타로 교체되었고 팀은 투수 3명이 9이닝을 2실점으로 막아내면서 3:2로 승리한다. 다음 날인 4월 8일 스미스는 샌프란시스코 투수 짐 바르(Jim Barr)를 상대로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면서 데뷔 첫 안타를 기록한다.


스미스의 통산 10번째 경기였던 1978년 4월 20일 4회초 2사 상황에서 애틀랜타의 4번타자 제프 버로스(Jeff Burroughs)가 타석에 들어섰다. 버로스의 타구는 유격수 쪽으로 날아갔고 스미스는 다이빙캐치를 시도했다. 그 순간 불규칙 바운드가 심하게 튀었고 공의 방향이 다이빙한 스미스의 오른쪽으로 꺾였지만 스미스는 타구를 맨손으로 잡고 빠르게 일어나서 1루로 송구해서 아웃카운트를 잡아낸다.



이 수비는 스미스가 본인 인생 최고의 수비로 꼽는 장면이다. 2011년 MLB Network는 이 수비를 역사상 가장 화려한 수비로 선정하기도 했다. (MLB Network named it the most spectacular defensive play in MLB history)


1978년 10월 1일 스미스는 마지막 홈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팀의 홍보 담당이었던 앤디 스트라스버그(Andy Strasberg)가 스미스를 찾아온다. 스트라스버그는 스미스가 백플립을 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팬들을 위해서 백플립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스미스는 당시 팀의 베테랑이었던 진 테너스(Gene Tenace)와 상의한 후 백플립을 팬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리고 백플립은 스미스의 시그니처가 된다.

1978년 스미스는 159경기 0.258/0.311/0.312 40도루 bwar 3.3 fwar 2.7을 기록했고 NL 신인왕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한다. (1위는 애틀랜타의 Bob Horner)

1979년 2년 차의 스미스는 시즌 시작과 동시에 극심한 타격 부진에 빠지면서 32타수 무안타로 시즌을 시작한다. 이 부진은 시즌 내내 이어졌고 시즌 156경기 0.211/0.260/0.262 0홈런 27타점 28도루했다. 그리고 규정타석 타자 중 타율, 출루율, 홈런, 타점 최하위, 장타율 뒤에서 2위를 기록한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연봉과 관련해서 팀과 갈등이 시작된다.

1980년 스미스는 단일 시즌 최다 어시스트 621개를 기록하면서 데뷔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했고 이후 13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1981년 3월에는 기사에서 '오즈의 마법사'라는 별명이 처음 사용되었고 이 별명은 스미스의 대표적인 별명이 되었다. 스미스는 1981시즌 후보 선수로 생애 첫 올스타전 출전도 하게 된다.


1981시즌이 끝난 후 세인트루이스는 팀의 주전 유격수인 개리 템플레튼(Garry Templeton)을 트레이드하려고 한다. 템플레튼은 시즌 중 관중들에게 야유, 인종차별을 받았는데 그때 잘못된 대처를 하면서 감독과 몸싸움을 했고 시즌 후 트레이드를 요구하게 된다. 세인트루이스는 샌디에이고와 스미스가 갈등을 겪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양 팀 주전 유격수를 메인 칩으로 트레이드를 논의한 후 12월 10일에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하지만 변수가 발생한다. 스미스에게는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다는 것이었다. 스미스는 캘리포니아를 선호했기 때문에 이를 풀어주지 않으려고 했고 이듬해 1월에도 기자들에게 샌디에이고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2월에 세인트루이스와 합의를 했고 1982년 2월 19일 트레이드가 이루어진다. 트레이드 내용은 아래와 같다.


STL get : Ozzie Smith, Steve Mura, Al Olmsted

SD get : Garry Templeton, Sixto Lezcano, Luis DeLeon


샌디에이고에서의 4년 동안 스미스는 통산 583경기 0.231/0.295/0.278 516안타 1홈런 147도루 bwar 10.9 fwar 8.1 wRC+ 69을 기록하고 세인트루이스로 가게 된다.


여담으로 템플레튼은 이후 샌디에이고에서 통산 10시즌 동안 올스타 1회, 실버슬러거 1회를 기록했고 이후 샌디에이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3. 세인트루이스 시절 초창기 (1982~1984년)


스미스가 트레이드되어 세인트루이스에 온 당시 세인트루이스의 감독은 화이티 허조그였다. 화이티 허조그는 이후에 카디널스의 영구결번이 되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된다. 허조그는 그 당시 화이티볼(Whitey Ball)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타격보다는 투수, 스피드, 수비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허조그가 화이티볼을 사용했던 이유는 홈구장인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은 인조잔디 구장에 구장 크기가 크기 때문에 타구가 빠르고 홈런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즉 좋은 수비와 빠른 스피드를 가진 스미스는 화이티볼에 매우 적합한 선수였다.


BuschMemorialStadium.jpg [MLB 레전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Busch Memorial Stadium, 1966~2005년)



허조그는 스미스에게 땅볼을 많이 만들어내면 타격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스미스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내기의 내용은 간단했다. 땅볼을 치면 스미스가 이기고 플라이를 치면 허조그가 이기는 방식이었다. 이 내기는 시즌 내내 이어졌고 스미스는 더 많은 땅볼을 만들어내서 300달러를 가져갔다고 한다.


실제로 타구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1988년부터 살펴보면 스미스의 땅볼/플라이 비율은 1.11로 MLB 평균인 0.81보다 높은 수치이다.

이를 라인드라이브/땅볼/플라이 순서대로 백분율로 나타내면 스미스는 MLB 평균보다 7%정도 많은 땅볼을 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스미스 : 20.2/50.7/18.9

MLB 평균 : 20.7/43.6/25.0


허조그의 예상은 적중하게 된다. 스미스는 140경기에서 0.248/0.339/0.314를 기록하면서 데뷔 첫 시즌과 같은 wRC+ 84를 기록했고 bwar 5.1 fwar 4.1을 기록한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는 1982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 스미스의 데뷔 첫 포스트시즌이었고 세인트루이스 역시 1968년 이후 첫 포스트시즌이었다. 


NLCS에서 애틀랜타를 만나서 스윕 승을 거뒀고 스미스는 9타수 5안타의 맹타를 휘두른다.

그리고 WS에서 밀워키를 상대하게 된다. 아쉽게도 스미스의 타격은 식었지만 실책 없이 월드시리즈를 마쳤고 세인트루이스는 4승 3패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82년의 활약으로 스미스는 1983년에 연봉 1M을 처음 넘게 된다. 이해 스미스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올스타전 선발 유격수가 된다.



4. Go crazy, folks, go crazy! (1985년)


1985년부터 스미스는 타격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데뷔 이후 최고 타율이 0.258이었던 스미스는 85년에 타율을 0.276까지 높혔고 wRC+ 104를 기록하면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100을 넘기게 된다. 이후 스미스는 전성기 기간 동안 리그 평균의 타격을 보여준다.

세인트루이스 역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규 시즌 101승을 거두었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된다.


세인트루이스의 NLCS 상대는 LA다저스였다. 7전 4선승제인 NLCS에서 4차전까지 2승 2패로 양 팀이 맞선 가운데 5차전이 시작되었다.

다저스의 선발투수는 8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고 세인트루이스는 4명의 투수로 9이닝을 2실점으로 막았다. 9회말 2:2 상황에서 다저스는 당시 마무리 투수였던 톰 니덴푸어(Tom Niedenfuer)를 마운드에 올렸다. 스미스는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석에 나왔다. 니덴푸어는 우투수였고 스위치히터인 스미스는 좌타석에 들어왔다. 스미스는 원래 우타자였기 때문에 좌타석에서의 파워는 0에 가까웠고 실제로 1985시즌까지 좌타석에 들어선 3368타석 동안 단 1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미스는 니덴푸어의 4구를 걷어올렸고 이 타구는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을 살짝 넘어가는 끝내기 홈런이 된다.


https://youtu.be/L4PB0XoLbm8

아지 스미스의 끝내기 홈런 (1985년 10월 14일, NLCS 5차전)


이 장면은 애노스 슬래터의 광란의 질주, 데이빗 프리즈의 끝내기 홈런 등과 함께 세인트루이스 역사상 최고의 장면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홈런은 스미스의 포스트시즌 유일한 홈런이다.


스미스는 좌타석에서 3368타석 동안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는데 이와 비슷한 통산 타석 수를 가진 KBO 선수는 김원섭(3396타석)이다. 현재 KBO 최다 타석 무홈런은 조용호의 1447타석이다.


그리고 스미스는 이 홈런 이후 2년 동안 홈런을 단 한 개도 기록하지 못한다. 스미스는 이후 은퇴할 때까지 좌타석에 들어서서 5개의 홈런을 기록한다.


세인트루이스는 이어진 6차전에서도 승리하면서 4승 2패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스미스는 6경기 0.435/0.500/0.696을 기록하고 NLCS MVP가 된다.


세인트루이스가 3년 만에 다시 올라온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캔자스시티였다. 스미스는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087로 부진했지만 세인트루이스는 4차전까지 3승 1패로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5차전에서 패배했고 6차전 9회초까지 1:0으로 앞서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오심이 나오게 된다.


https://youtu.be/vyt1xEvqqow

돈 덴킹거 1루심의 오심 (1985년 10월 26일, WS 6차전)


이 오심으로 1사 주자 없는 상황이 무사 1루가 되었고 이후 안타 - 땅볼 - 폭투 - 고의사구 - 2타점 끝내기 안타로 세인트루이스는 6차전을 패배한다. 그리고 7차전에서 캔자스시티의 21살 영건에게 완봉패를 당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한다.


시즌이 끝난 후 놀라운 사실이 하나 알려지게 되는데 스미스는 7월에 오른쪽 어깨 회전근에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경기에 뛰고 싶은 마음으로 수술을 하지 않고 재활을 선택했고 시즌을 완주해낸다.



5. 이어지는 전성기 (1986~1992년)


1987년 스미스는 세인트루이스 이적 후 첫 풀타임 2번타자를 맡게 된다. 그리고 스미스는 타출장에서 모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다. 스미스 커리어 유일의 타율 3할도 이 시즌이다. (0.303/0.392/0.383) 이런 활약 때문에 올스타 투표 1위에 올랐고 시즌 후 실버슬러거,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소속 팀 세인트루이스 역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서 MVP 투표에서도 많은 표를 받았고 MVP 2위를 기록했다. 아쉬운 건 팀 동료인 잭 클락과 같이 후보에 올라서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MVP는 컵스의 안드레 도슨이 차지한다. 하지만 시즌 0홈런으로 MVP 2위를 차지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세인트루이스는 NLCS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월드시리즈에 올라가지만 월드시리즈에서 미네소타에게 7차전 승부 끝에 패배하고 85년에 이어서 다시 한번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1987년 시즌 후 스미스는 2.34M의 연봉을 받으면서 NL 최고 연봉자가 되었다. 2위는 마이크 슈미트, 3위는 게리 카터였다. 이 3명은 이후에 모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게 된다.


1989년에는 수비로 엄청난 스탯을 쌓으며 dWAR 4.8(역대 5위), Def 40.2를 기록했고 스미스는 이 시즌에 WAR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다. (bwar 7.3, fwar 6.7)


스미스는 세인트루이스 입단 후 1992년까지 전성기를 보낸다. 82년부터 92년까지 11시즌 동안 1625경기 0.272/0.354/0.344 1592안타 21홈런 395도루 bwar 59.9 fwar 54.1을 기록했다. 11시즌 모두 올스타전에 출전하고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실버슬러거는 1987년이 유일했고 MVP 투표에서는 6시즌 표를 받았다.


1992시즌이 끝난 후에는 생애 첫 FA 자격을 얻었고 FA로 풀렸다가 1달 후에 세인트루이스와 재계약을 맺었다.



6. 선수생활 말년 그리고 은퇴 (1993~1996년)


하지만 스미스는 1993년 이후 100경기 이상을 소화하지 못하게 된다.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의 인조잔디에서 너무 오래 뛰었고 그로 인한 무릎 부상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1993년 스미스는 골드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하면서 연속 수상 기록은 13년에서 중단되었다.(93년 수상자는 피츠버그의 제이 벨) 13개의 골드글러브는 역대 유격수 1위 기록이며 전 포지션으로 확장해도 그렉 매덕스(투수, 18개), 브룩스 로빈슨(3루수, 16개)에 이어 이반 로드리게스(포수, 13개)와 공동 3위이다. 그리고 스미스는 93년 올스타전에도 출전하지 못하면서 1981~1996년 중 유일하게 올스타전에 나가지 못하는 시즌이 되었다.

1994년에는 단축시즌이 진행되었고 98경기 출전에 그쳤으며 1995년에는 어깨 수술을 받으면서 커리어 로우인 44경기 출전에 그쳤고 타율도 1할대로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해에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한다.


https://youtu.be/R6-BgGHQt24

1995년 개막전에서의 스미스의 백플립 (1995년 4월 26일)


1996년 41살의 스미스는 스프링캠프에서 로이스 클레이튼(Royce Clayton)과 경쟁을 하게 된다. 스미스는 타율 0.288에 0실책을 기록했고 클레이튼은 타율 0.190에 8실책을 기록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에 새롭게 부임한 토니 라 루사 감독은 클레이튼에게 기회를 더 주게 된다. 스미스는 이를 부당하다고 느꼈고 라 루사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된다. 개막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중순에 라 루사는 스미스에게 트레이드를 원하는지 물어보게 된다. 스미스는 트레이드 대신 시즌 후 은퇴를 선택했고 6월 19일에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한다.

스미스는 은퇴를 발표할 당시 슬래시 라인이 0.239/0.292/0.269였지만 은퇴 발표 이후 시즌이 끝날 때까지 0.300/0.385/0.413을 기록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https://youtu.be/UWB5J-0zr8k

스미스의 마지막 올스타전 (1996년 7월 9일)



세인트루이스는 1987년 이후 9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NLDS에서 샌디에이고를 만나서 스윕 승을 하면서 NLCS에 진출한다. 하지만 애틀랜타와의 ALCS에서 3승 4패로 패배했고 스미스는 ALCS 7차전에 대타로 나와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나면서 커리어 마지막 타석을 마무리한다.


https://youtu.be/fBrDOnz202U

스미스 커리어 마지막 타석 (1996년 10월 17일, NLCS 7차전)




아지 스미스의 통산 성적

19시즌 2573경기 0.262/0.337/0.328 2460안타 28홈런 793타점  580도루 1257득점 1072볼넷 589삼진 bwar 76.9 fwar 67.6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영구결번

80년대 세인트루이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역대 최고의 수비를 보여주었던 아지 스미스였기 때문에 은퇴와 동시에 그의 등번호 1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7. 은퇴 이후 및 여담


은퇴 이후에는 방송계에서 활동을 했고 사업가로도 활동을 했다. 라 루사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라 루사가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기간 동안 팀 행사에는 잘 나오지 않게 된다. 하필 라 루사가 2011년까지 재임하면서 그 기간은 더 길어지게 되었다. 라 루사가 물러난 2012년 스프링캠프에 특별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다.



명예의 전당

2002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아지 스미스는 91.7%의 높은 투표율을 얻고 그 해 유일하게 투표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선수가 되었다. 명예의 전당 선수라고 보기 어려운 타격 능력이었지만 역대 최고의 유격수 수비를 선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첫 턴이었다.


HOF.png [MLB 레전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

역사상 최고의 수비력
통산 dWAR 44.2 역대 1위
1989년 기록한 단일 시즌 dWAR 4.8 역대 5위, 라이브볼 시대 3위
통산 TZ 239 역대 2위
1989년 기록한 단일 시즌 TZ 32 역대 9위

전 뉴욕 메츠의 유격수인 버드 해럴슨(Bud Harrelson)은 스미스의 수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만약 아지가 공을 놓쳤다면 여러분은 그 타구를 잡을 수 없는 타구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다른 유격수가 타구를 놓쳤다면 여러분이 처음 하는 생각은 아지라면 잡을 수 있었을까? 일 것이다"


젊은 아지들(Young Ozzies)
스미스의 선수 생활이 막바지로 접어든 무렵 MLB에는 스미스와 같이 좋은 수비력을 가진 유격수인 아지 기엔과 오마 비스켈이 나타났다. 그리고 스미스가 은퇴하는 해에는 레이 오도네즈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1995년과 1996년은 3대 유격수인 A-로드, 노마 가르시아파라, 데릭 지터가 등장한 해였다. 이들의 화려한 공격력을 보게 되자 점차 유격수를 보는 기준에서 수비력이 낮아지기 시작했고 위의 3명은 비스켈을 제외하고 오랜 기간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하게 된다.


그 외 스미스의 특별한 기록
올스타 투표 누적 득표 1위 (2750만 표 이상)

만루홈런 없이 역대 MLB 최다 타석 (10778타석)

역대 10000타석 이상 소화한 타자 중 최저 장타율 (0.328)

1999년 팬 투표로 진행된 MLB ALL-Century Team 유격수 부문 3위 (1위는 칼 립켄 주니어, 2위는 어니 뱅크스)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부인 빌 제임스는 수비를 포함하면 아지 스미스를 역대 2위 유격수로 뽑았다. (1위는 호너스 와그너)



TMI


고등학교 시절 스미스와 함께 뛰었던 MLB, NBA 영구결번 선수000.jpg [MLB 레전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

(상) MLB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자 볼티모어의 영구 결번(No. 33) 에디 머레이

(하) 밀워키 벅스의 영구결번(No. 8) 마커스 존슨



스미스의 데뷔전에서 등판했던 3명의 투수

000000.jpg [MLB 레전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

(좌) MLB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영구결번(No. 36) 게일로드 페리

(중) 1968년 WS MVP이자 종전 메이저리그 좌완 최다 탈삼진 기록 보유자 미키 롤리치

롤리치의 경우 포수 빌 프리한과 324경기에서 호흡을 맞춰 역대 1위에 올라있다. (웨이니 몰리나가 274경기)

(우) MLB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자 오클랜드, 밀워키의 영구결번(No. 34) 롤리 핑거스



1985년 NLCS 5차전 다저스의 선발투수

valenzuela.jpg [MLB 레전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
유일무이한 신인왕, 사이영상 동시 수상자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1985년 WS 7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캔자스시티 영건 투수

saberhagen.jpeg [MLB 레전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
1985년 월드시리즈 MVP이자 사이영 2회 수상자 브렛 세이버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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